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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군축-군비축소

단계별 군축

김승국

남북한의 군비통제 및 군축에 대한 시각을 보면, 북측이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군축 노선’을 택해 왔던 반면, 남측의 접근방법은 현실(주의)적이지만 소극적이고 일견 수세적인 ‘군비통제 노선’을 취해 왔다. 북측은 오랫동안 동시적 ・포괄적 접근에 입각하여 ‘선(先) 군비감축, 후(後) 신뢰구축’ 방식을 제시해 왔다. 이에 비해 남측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구축을 강조함으로써 단계적 ・점진적 접근을 택하여 ‘先 신뢰구축, 後 군비감축’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신뢰구축 →운용적 군비통제 →구조적 군비통제(혹은 정치적 신뢰구축 →군사적 신뢰구축 →군비감축)이라는 단계적 방안은 유럽의 재래식 무기감축 협상의 사례를 참고한 방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고위급회담을 통하여 상대방의 논리와 용어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남북 기본합의서’ 및 후속 합의를 이루어냈다.<함택영 「한반도 군축과 민족 공동체 건설」 {제주 평화회의 자료집}(2003) 277쪽>

현 상황에서 군비감축이야말로 가장 유력한 신뢰구축 조치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남측이 강조하는 신뢰구축과 북측이 강조하는 군축은 단계적인 선후의 문제이나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남측의 일견 논리적이며 현실성 있는 군비통제 방안, 특히 신뢰구축은 북한이 그러한 협상에 참여하기 전에는 실현시킬 방도가 없다. 그러나 남북한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이 어려운 이상 정치적 신뢰구축이 요망된다. 남북한 군축문제는 남북한 관계의 핵심을 차지하는 사항이며, 사실 정치적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다행히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신뢰구축은 군사적 신뢰구축으로 진전될 수 있다.<함택영 「한반도 군축과 민족 공동체 건설」 {제주 평화회의 자료집}(2003) 277쪽>

1. 군비통제와 군축 병행(‘군축’의 제1단계)

군비통제와 군축은 개념상 다르지만 남북 기본합의서(1991년 12월 체결)에 따라 병행할 수 있다. 남북 기본합의서 제12조는 군사공동 위원회가 ‘대규모 부대 이동과 군사 훈련의 통보 및 통제 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문제, 군 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문제, 대량 살상 무기와 공격 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 문제, 검증 문제 등 군사적 신뢰 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 ・추진한다’고 규정했다.

남북 기본합의서는 이처럼 군비통제와 군축을 병행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체결 직후인 1992년 초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군축지향적인 제의를 수없이 했으나, 군비통제 지향적인 남한 쪽에서 메아리가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주1) 남한쪽이 구두선처럼 외치는 신뢰구축마저 잘되지 않는 한반도의 정세에서 군비통제와 군축을 병행하면서 평화 로드맵의 제1단계를 군사적으로 매듭짓는 지혜가 아쉽다.

군비통제 ・군축 병행의 핵심은 남북한의 신뢰구축 ・적대관계 해소에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적대를 해소하는 첩경은, ‘남
북한이 서로 주적(主敵) 관계로 설정한 군사전략’의 마찰을 줄이는 데 있다. 같은 동포임에도 불구하고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군사적으로 상호 주적인 상태를 해소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군사적 상극 상태에 평화의 바람을 넣어 군사적 상생 관계 즉 남북 공동안보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며, 이에 걸맞은 안보 패러다임의 전환-냉전구조의 해체가 뒤따라야 한다.

  1) 냉전구조의 해체

이철기 교수가 언급하듯이,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 조건으로서는 북한체제의 안전에 대한 보장, 주한미군 문제의 합리적 해결,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군축의 추진을 들 수 있다.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체제생존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북한의 ‘평화적 생존전략’을 인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북한의 안보 딜레마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북한이 안보적 위협을 느끼는 한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군사적 대결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한미군 문제의 재정립과 이에 대한 합리적 해결이 필요하다. 더구나 남북관계 및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과 장래문제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이다. 한반도 평화 문제의 핵심은 군사안보 문제이며, 그 핵심 고리는 주한미군 문제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장래는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남북한과 미국 3자 간에 어떤 식으로든 협상과 합의를 통해 재정립이 불가피하다. 북한이 주한미군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느끼는 한, 한반도 평화체제와 남북 간 군축을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주한미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남북한의 균형군축도 불가능하다.

한편 한반도에서 냉전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에 군비경쟁을 종식시키고 군비의 안정화 ・균형화를 통해 군사적 불안정과 불균형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는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마련과 남북 간에 실질적인 상호군축의 단행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돼 온 군비경쟁과 과도한 군비의 보존은 남북 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군사적 대치를 구조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군축을 통한 과도한 군비의 해체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와 평화를 위한 핵심적 조건이다. 상대방을 침략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군비를 그대로 둔 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축은 군사적 불안정 및 불균형의 제거, 군비경쟁의 종식, 무력통일의 배제를 통해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군축의 목표는 군비의 단순한 수량적 균등화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의 군사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비공격적으로 재편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는 군비의 공격적 성격을 방어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대규모 군비를 적정 수준으로 감축하며, 군사활동의 투명성 및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군비의 방어적 성격으로 전환’은 군사전략의 방어적 성격으로의 전환, 군 구조를 비롯한 군사태세의 방어 지향적 재편, 공격적 무기 및 대량파괴무기의 감축 등을 수반한다. 다음으로 ‘대규모 군비의 적정수준으로 감축’은 대규모 공격능력의 제거와 함께 ‘방어적 충분성(defensive sufficiency)’ 원리에 따른 적정 수준의 군비 보유를 의미한다.

특히, 한반도의 군축은 남북 모두 현재의 공세적인 안보 정책 및 군사전략을 방어적 성격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능조건으로 한다. 남북한이 지금과 같이 ‘억지론’과 ‘공제적 전략’에 기초하고 있는 한, 남북 간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과 군비경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대안적인 정책 및 전력으로서 ‘헬싱키 선언’ 이후 ‘유럽 안보협력 기구(OSCE)’를 통한 유럽에서 다자안보협력의 이론적 배경이 된 ‘협력안보론(cooperative security)’과 ‘유럽 재래식 군축 조약(CFE)’의 전략적인 배경 역할을 한 ‘비공세적 방어(non-offensive defense)’ 전략에 대한 한반도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철기 「한반도 평화체제와 정치 ・군사적 방안 모색」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모색}(이장희 편저, 2001) 7~9쪽>

  2) 전 환

앞의 글에서 ‘군비의 공격적 성격을 방어적 성격으로 전환 / 군사전략의 방어적 성격으로의 전환’ 등 용어가 나오며 ‘전환’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전환’은 군수산업을 민수산업으로 탈바꿈하는 ‘전환’ 없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국가들에 있어서 군사비 감축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군사적인 측면뿐 아니라 민간시장 부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군수부문의 감축이 가져올 부정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등장한 것이 ‘전환’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환’은 필연적으로 군비감축과 관련이 있다.<김진기 「전환연구의 이론적 제문제」{평화연구} 제12권 2호(고려대 평화연구소, 2004년 봄) 10쪽>

전환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소위 ‘평화적 부수효과(peace dividend)’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전환의 초기단계에서는 방위비 지출 삭감으로 인한 직접적 조정비용으로 인하여 비용(기회비용까지를 포함하여)이 효과를 초과하여 나타나지만 이후 조정에 투입되는 비용이 민간재화와 서비스로 환원되어 돌아오기 시작하면 peace dividend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김진기 「전환연구의 이론적 제문제」{평화연구} 제12권 2호, 2004년 봄) 23/30쪽>

특히 남한은 미국 군 ・산 복합체와 펜타곤 우산 아래에 있어서 일상적으로 미국제 무기의 과잉도입 상태에 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군축을 통한 평화통일에 접근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미국제 무기의 과잉도입을 줄임으로써 군축-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전환’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2. 강도 높은 군축(‘군축’의 제2단계)

평화 로드맵의 제1단계의 군비통제 ・군축 병행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反戰) 시스템(anti war system)’을 만든다. 이 시스템을 확고한 틀로 굳히기 위해 평화 로드맵의 제2단계에서 ‘강도 높은 군축’을 실시하며 2단계의 후반부에서는 연방제를 준비하기 위한 ‘비전(非戰) 시스템(no war system)’을 시도한다. 강도 높은 군축의 기본전제는 외국군의 완전 철수이며 한반도 전체의 경무장화(輕武裝化)이다. 경무장화의 조건이 갖춰져야 평화국가 연합으로 진입할 수 있다.

3. 비무장 연방제 지향(‘군축’의 제3단계)

연방제 통일의 초기단계에는, 민족방어에 주력하는 차원에서 적정한 무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방제 통일이 안정되는 속도에 걸맞은 비전(非戰) 시스템 즉 ‘비무장 ・비동맹 중립-동북아 비핵 지대화’를 지향하는 비무장 연방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비무장 연방제의 기본 원리인 ‘비무장 ・비동맹 중립’을 시행하는 나라는 코스타리카이다. 코스타리카에는 상비군이 없고, 최소한의 경찰과 민간 예비 자위조직이 시민사회를 자체 방어한다. 이러한 민간 주도 방위론은 샤프(Gene Sharp)의 CBD(Civilian Based Defense) 이론과 관련이 있다.

  1) CBD

CBD는 외세의 침략이나 군사 쿠데타 등 정당하지 않은 정치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거나 억압하려고 드는 경우 비폭력 저항의 수단으로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고 또 물리치는 집단활동의 전략전술이다. 이 운동의 이론가인 Gene Sharp는 비폭력 저항 행위를 하나의 전투로 비유하고 그 싸움에 활용하는 정치기법이나 수단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가 항의와 설득, 둘째가 불복종과 비협조, 셋째는 비폭력 간섭(Non-violent Intervention)이다. CBD이론과 기법은 국민들로 하여금 실제로 주권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CBD운동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다양하게 전개될 수가 있다. 한국이 처해 있는 현실여건을 보아서 CBD운동은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한승조 「CBD이론과 한국의 민주시민교육」 {평화연구} 제3호(고려대 평화연구소, 1994) 111~113쪽>

  2) 탈무장화

군사적 방위에서 민간주도 방위전략으로의 전환은 이 이론가들에겐 방어능력의 축소나 포기가 아니라 군사적 ‘무장’으로부터 정치사회 경제 심리적 무기를 통한 전 국민의 ‘무장화’를 의미하게 되는데 진 샤프의 경우 그러한 과정을 탈무장화(transarmament)라고 부르고 있다.<강성학 「CBD이론에서 본 한반도의 안전보장과 그 전망」 {평화연구} 3호(고려대 평화연구소, 1994) 123쪽.

이처럼 CBD의 궁극적 목적은 탈무장화이다.
탈무장은 군축이나 무장해제와는 다르며 기존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형태의 무장으로부터 탈피하여 사회 내의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무기를 사용하면서 국민(시민)에 의존하는 무장의 형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폭력적 무장이다. 탈무장이 군축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탈무장은 군축이며 완전한 탈무장은 비무장이라 할 수 있다.<현인택 「CBD이론에서 본 남북한 평화통일방안」 {평화연구} 4호(고려대 평화연구소, 1995) 146~147쪽

군축이 상호불신, 군사력 측정난 등으로 실행이 쉽지 않으나, 탈무장화로서의 CBD는 시민(시민사회 조직)의 시민방위(Civilian Defense)만 있으면 실행 가능하다.

    3) CBD와 연방제 통일

연방제 통일 이전 단계에는 상비군 중심의 군축논리로서 남북 공동안보 ・합리적 충분성 원칙 등이 중요했다. 그러나 연방제 통일의 초기단계에서는 중무장한 상비군이 무의미해지므로 방어 지향적인 민족방어 논리가 긴요하다. 또 연방제 통일의 안정기에는 비무장 연방제를 지향하므로, 탈무장화가 중요한 가치가 되고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방편 중 하나로 CBD 등을 거론할 것이다. 이때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을 지키고 생명을 보위하기 위한 생명안보 차원에서 CBD 등을 비무장 연방제의 안보 논리로 채택해 봄 직하다.(200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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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남북한의 군비통제 ・군축 제안의 차이점에 관하여 {코리안 엔드게임}(셀리그 해리슨 지음 / 이흥동 외 옮김, 2003)의 제12장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