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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동양의 평화이론

평화 사경 (44)-吾喪我

평화 사경 (44)-吾喪我

 

김승국 정리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子綦曰:「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女聞人籟而未聞地籟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子游曰:「敢問其方。」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佳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眾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子游曰:「地籟則眾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1咸其自取怒者其誰邪!」

 

위의 문구 중에서 吾喪我(오상아)’가 평화와 관련이 있는 듯하여 몇가지 해설을 붙이면서 본인의 사견을 덧붙인다.

 

<기세춘의 번역>

吾喪我(오상아)’ 이전의 문구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남곽의 자기子綦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을 우러러 숨은 쉬며, 멍아니 몸을 잊은 듯했다.

제자인 안성자유子遊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처럼 하고 계시니......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같습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훌륭하구나! 그것을 질문하다니.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출처; 기세춘 옮김 장자(서울, 바이북스, 2011)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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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멍의 역해>

남곽자기가 탁자 뒤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넋이 나간 듯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안성자유가 그의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육체는 본래 마른 고목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마음은 식은 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탁자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잘 물어보았구나. 내가 지금 나 자신을 잊고 있다는 걸 자네는 아느냐?”

 

...육체(또는 얼굴)는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식을 재와 같다. 이 말은 굉장히 신선하고 생생한 표현이다....장자는 어땠을까? 그는 정말로 마른 고목과 식은 재처럼 자신을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했을까?...‘오상아吾喪我와 비슷하지만 좀 더 긍정적인 말 중에 망아忘我라는 것이 있다. ‘자신을 잊는다는 뜻이다. 자신을 잊어야만 혁명에서든 노동에서든 창조에서든 전쟁에서든, 아니면 예술공연에서든 운동경기에서든 놀이에서든 사랑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최고조에 도달해 자신을 내던져 몰두할 수 있다....하지만 이건 장자이 좌망[坐忘]과는 전혀 다르다. 장자이 좌망과 상아喪我는 최고조의 상태가 아닌 텅 비고 아무 욕망도, 의지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나타나는 망각이다. 최고조에 이르러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마른 고목과 식은 재와 같은 경지에 도달해 자신을 잊고, 눈과 얼음처럼 냉정하게 좌망하는 것이다. 심지어 눈과 얼음처럼 차디찬 상태에서 스스로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지금의 남곽자기는 예전의 가 아니다라고 한 말에서 남곽자기는 정신적 차원에서 한 단계 상승해 마른 고목과 식은 재와 같고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이고. ‘을 뜻한다. 그러므로 오상아내가 나를 장사 지낸다는 뜻이다. 장자의 이 주장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예로부터 장자학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이 심오한 주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앞에 나오는 진아眞我’, 참된 나를 뜻하고, 뒤에 나오는 아견我見’, 나의 견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참된 나란 타고난 그대로의 자연적이고 순수하며 질박하고, 대도[大道]에서 출발해 나와 대도[大道]와 더불어 노니는 훌륭한나이고, ‘나의 견해란 한쪽으로 치우치고 이미 선입견이 굳어진데다가, 식견이 좁고 얕으며 후천적으로 거짓지식과 습관의 영향을 받은 그리 훌륭하지 못한 더러운 나이다...바로 내가 인식의 주체이자 인식의 대상인 것이다. 자각적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 말고 또 있겠는가? 이런 자기 관찰과 자아 반성, 자아비판이 바로 오상아라는 인식의 바탕이 된다. 또한 주체로서의 나인 와 객체로서의 나인 를 적당히 분리하는 것은 중국 전통문화에서 강조하는 수신이라는 명제의 바탕이자 심리학과 같은 여러 학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는 이토록 후하게 해석하고, ‘는 그리 좋지 않게 해석한 것은 후대 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노장사상에서 크게 벗어난 가치관을 가지고 억지로 해석한 것이다. ‘는 구분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다. ‘가 바로 이고, ‘가 바로 인 것이다. ‘오상아란 내가 나 자신을 잊고, 자신의 존재를 잊고, 대도를 깨닫고 감동받고 완전히 믿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이미 도를 얻어 지인[至人], 진인[眞人], 성인, 선인[仙人]이 되어 천지의 바른 기운에 순응하고 육기를 조절해 무궁함에서 노닐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산할 필요도, 겨를도 없는 상태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출처;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나는 장자다(파주, 들녘, 2011) 71~86>

 

[]과 나에 대한 논의는 이미 생명과 자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들에 근접해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나와 감지될 수 있는 나의 것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또 어떻게 구별되는 걸까? 나는 나의 주체이고, 내가 돌이켜보는 객체이기도 하다. 이 객체, 즉 돌이켜보는 는 물[]일까, 나일까? 또 앞에서 장자가 남곽자기의 입을 빌려 말한 오상아란 나를 완전히 잊고 무아無我의 상태가 되는 것인데, 이 경웅 생겨나는 패러독스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옛 성현들이 말한 주체, 가 바로 참된 나이고, 잊혀진 객체인 는 각종 편견과 선입견, 사심, 잡념에 가려지고 왜곡된 거짓된 나이다. 이것을 두 번째 나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거짓된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인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설마 외물[外物]에서 나온단 말인가? ‘는 완전히 잊혀지고 부덩당해야함 객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두 번째 나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과 애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출처;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나는 장자다(파주, 들녘, 2011) 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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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덕청(憨山德淸) 지음, 심재원 역해 장자, 의 물결(서울, 정우서적, 2012) 91~95>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책상에 기대어 앉자 하늘을 우러르면서 숨을 내쉬었다. 멍한 모습으로 그 짝을 잃은 듯했다. 안성자유(顏成子游)가 앞에 서서 시중들다가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을 정말로 고목처럼 되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정말로 꺼진 재처럼 되게 할 수 있으니, 지금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은 예전에 책상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말했다. “()! 별로 질문이 좋지 않구나! 지금 나는 자아를 잃었다. 네가 그걸 알 수 있겠는가?”

 

자기(子綦)는 몸을 잊었다. 즉 형과 마음을 다 잊었다. 혹은 잃었다. 그러면 누가 자아를 잊었는가? 자아는 이다. 그러면 자아가 자아를 잊는 것이 되는데 이는 이상한 표현이고 현상이다. 그런데 장자가 남곽자기의 말을 통해 표현한 개념에 의하면, 잊음을 당한 자아와 자아를 잊은 는 한자어가 다르다. ‘()’()’의 차이가 있다. 내가 번역어를 다르게 썼지만 이 둘은 결국 인데 내가 나를 잃었다고 할 때 이 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서 감산덕청은 앞의 ()’眞君(진군)’이라고 한다. 이 진군을 진아(眞我)’라고 표현해도 된다. 그러면 진아(眞我)’이고 가아(假我)’가 된다. 불교의 법성종(法性宗)에서는 이 진아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래서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사인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은 이 진아를 本覺眞心(본각진심)”이라고 불렀다. 본래 깨어 있는 참된 마음이란 뜻이다.

지금 남곽자기가 형과 마음을 모두 잊었다고 할 때 몸을 잊었다는 것은 뒤의 나인 [자아]’를 잊은 것이다. 이 자아가 바로 가아이다. 그러면 앞의 []’는 진아가 될 것이다. 결국 내가 나를 잃었다는 자기의 말은 진아가 가아를 잊었다는 의미가 된다. 심성론으로 표현하자면 진심(眞心)이 가심(假心)을 잊었다가 된다. 가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우리의 마음이 바로 ‘()이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깨닫고 보면 가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아가 가짜라는 것은 자아가 ()하다는 의미이다. 자아가 없음으로부터 생성하여 기나긴 진화를 해온 것뿐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자아는 어떤 일정한 실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밖의 대상과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리고 이 자아는 언젠가는 멸할 것이다. 자아는 생멸하는 공한 것일 뿐이므로 가짜[]’라고 한다. 즉 가설(加設)된 것이다.

남곽자기는 앉아서 사마디[三昧]에 들어감으로써 형과 마음, 한마디로 자아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아를 잃었다[喪我]”고 한 것이다.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자아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잊었다[]’는 표현보다 잃었다[]’는 표현이 더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은 우리가 흔히 () 당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죽는다는 의미이다. ‘喪我자아가 죽는것이다. ()의 명상수행은 곧 자아를 죽이는 수행이다. 가아를 죽이는 수행이다. 그러면 자아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는 무엇인가? 또 하나의 자아인가? 아니다. 이 나가 바로 진아이다. 보통 우리의 마음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마음이 바로 진심이다. 이 진심은 옮음그름 판단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마음처럼 오염되어 있지 않은 깨끗한 마음이다. 이러한 진심 혹은 진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장자사상은 불교의 법성종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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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의 사견>

吾喪我(오상아)’를 평화 쪽으로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사족을 붙인다;

 

평화의 담지자인 인가? ‘인가? 신약성서 마태복음 59절의 평화를 만드는 (peacemaker인 나)인가? ‘인가? ‘마태복음 59절을 실천하는 peacemaker인 나는 진아(眞我)이고, ‘진아의 평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거나 이룩하지 못하는 나는 가아(假我)’인가? 그렇다면 가아(假我)’가 주장하는 평화는 거짓 평화, 수준 낮은 평화, 사이비 평화인가? 대승불교에서 평화의 담지자인 보살은 인가? ‘인가? 이 때 평화의 담지자인 가 또 다른 담지자인 를 잊거나(; 坐忘)하거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가?

평화의식의 1인칭 주체인 ()’로 분할되는 주체 분할인가?

평화의 상태를 의식할 때 를 관조하는 것일까?

평화의 감수성을 느끼는 의 본바탕을 라고 하는 것일까?

의 왼쪽에 심방변을 붙인 사유하는 ()’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悟喪我는 불가능한가? 그럼 悟喪我의 평화의 경지는 무엇인가? 평화에 관하여 사유하는(悟) 나는 진아(吾)인가? 평화에 관한 사유능력이 부족한 나는 '假我'인가? 데카르트의 철학명제인 '나는 사유한다(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을 도입하면, [吾(진아)는 평화에 관하여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평화에 관하여 진정으로 사유하는 데 나의 존재이유가 있으며,그러한 내가 곧 '吾(진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