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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오키나와 전쟁의 집단자결 현장에서


김승국

필자는 지난 2월 4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다음에 오키나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집단자결(자살)’ 현장을 답사했다. 오키나와 전쟁 직후 요미탄손(讀谷村)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동굴(찌비찌리 가마), 이 집단자결을 소재로 한 그림이 전시된 ‘사키마(佐喜眞) 미술관’을 불러본 소감을 기술한다.


‘찌비찌리 가마’의 집단자결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전쟁을 개시한 미군이 맨 처음 점령한 곳이 요미탄손이다. 갈 곳 없는 주민 139명이 ‘찌비찌리’라는 종유굴로 피신하자마자 미군에 의해 포위된다.동굴 밖을 경계하던 2명이 죽창을 들고 미군병사에 대항하다가 사살된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은 극도의 공포(panic) 상태에 빠져들면서 ‘집단자결’ 분위기가 급속하게 조성된다.집단할복에 익숙한 일본군인처럼...

‘사키마 미술관’의 그림을 보면 집단자결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맨 먼저 ‘자신을 죽여 달라’고 18살의 딸이 어머니에게 애원한다. 곧장 어머니는 주방용 칼로 딸의 목을 쳐 죽인다. 종군 간호사이었던 그 어머니는 독물이 든 주사기를 나머지 가족을 향해 찌르며 살해한 뒤 자신의 팔에 마지막으로 주사기를 주입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먼저 죽인 다음 부모들의 동반자살이 이루어진다. 아버지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가족’을 낫으로 죽인 다음에 이불에 불을 붙여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단 2시간 만에 82명이 집단 사망하는 죽음의 광란극이 벌어진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찌비찌리 가마’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집단자결이 벌어졌으며, 미군에 의해 오키나와의 최남단에 있는 키얀미(喜屋武) 곶까지 밀려 더 이상 몸을 피할 수 없었던 수많은 민중들이 바다로 투신자살하였다. 이러한 집단자결을 형상화한 마루끼 이리(丸木位里) 부부가 오랫동안 요미탄손에 머물며 그린 그림들이 전시된 ‘사키마 미술관’으로 가보자.
맨 처음 눈에 띠는 작품은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1984년)이다. 이 그림은 아버지가 가족을 낫으로 찔러죽이거나 어머니가 독물 주사를 주입한 끝에 피바다를 이룬 ‘죽임의 지옥도’ 자체이다. 미군에 포위된 동굴 속의 초긴장 상태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떼죽음의 장면을 너무나 처절하게 묘사하면서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반전평화 미술품이다.

또 하나 ‘구메지마(久米島)의 학살’이라는 작품은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인 등이 일본군에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 이후 오키나와 서쪽의 외딴 섬인 구메지마에 숨어 지내던 일본 패잔병이 조선인 구 회중 씨 등의 주민들을 스파이로 여겨 집단학살한 내용이다. 구 회중 씨는 오키나와에 징용된 조선인인데, 당시 오키나와에 살던 1만 명의 조선인 군부(軍夫) · 종군 위안부 중 상당수가 일본군에 학살 당하고 점령군 미군의 포탄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2중의 죽임’을 당한 조선인의 넋이 지금도 오키나와의 구천을 헤매고 있다.

오키나와 전쟁의 희생양인 조선인 · 오키나와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서야한다. 전쟁을 준비하거나 일으키는 집단 · 전쟁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각종 이념을 유포하는 세력을 응징해야한다. 그런데 이들 세력을 대표하는 기관이 국가(군국주의 국가)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천황제 국가가 오키나와 집단자결의 뿌리에 있다.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병사 · 민간인들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절규하는 단어가 ‘어머니!’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전쟁의 경우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집단자살했다.

천황 · 천황제 국가를 죽음으로써 사수하기 위해 집단자살하는 집단심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 해답은 천황제 이데올로기 · 천황에 대한 맹신적인 숭배(cult)에 있다.

일본 군부는 천황제를 제대로 신봉하지 않는 오키나와인에게 지독한 천황제 교육을 시켰다. 오키나와인들은 ‘미국 · 영국이라는 귀축에 잡혀 죽거나 강간 당하느니 천황을 위해 자결하는 게 낳다’는 세뇌교육을 오랫동안 받았으며, 교육 받은 대로 동굴 속에서 집단자결한 것이다. 천황제 국가를 온몸으로 사수한다는 ‘국체호지(國體護持)’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자살했다. ‘가미가제’를 감행한 일본군 특공대처럼 옥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자결을 불러일으킨 원흉은 천황제 국가, 천황제 국가를 떠받든 군대이다. 당시 일본 군대의 ‘집단 할복’이 민간인에 전염되어 오키나와의 비극을 낳았다. 일본 군부는 ‘적의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하라’는 정훈교육을 했다. 적의 포로가 되면 아군의 편성 · 동향 · 진지 등의 군사기밀이 유출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은 입대전의 학교교육을 통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천황주의 교육을 지겹게 받아왔다.

일본군은 ‘군 · 관 · 민이 천황을 위해 공생(共生) · 공사(共死)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민간인에게 주입시켰다. 이 때문에 일본군인들은 국체호지의 전투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민간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 · 관 · 민이 천황을 위해 공생 · 공사해야 한다’는 군부의 논리 속에, 민간인의 집단자결을 선동하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

일본군부의 선동에 따라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요인이 강하므로, ‘강요받은 집단자결’으로 규정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한 지역은 모두 일본군의 ‘군 · 관 · 민의 공생 · 공사’ 선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집단자결의 현장에 일본군이 없었더라도 공생 · 공사의 공포심이 컸을 것이며, ‘귀축’ 미군이 들이닥쳤을 때 죽음의 공포심이 극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키나와의 집단자결은 일본군이 강요한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오키나와 주민을 학살한 일본군


사키마 미술관에는 집단자결에 관한 그림 이외에도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을 묘사한 것도 있다. 이 그림을 회상하면서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살해, 즉 일본군이 보호해야할 자국민을 학살한 참극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군(軍) · 민(民) 모두 천황을 위해 목숨 바쳐야한다는 의식이 뼈 속 깊이 침투된 상태에서 오키나와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 직후 미군이 파죽시세로 일본군을 무찌르며 전선이 무너지자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군이 협소한 곳에 뒤범벅이 되어 지내게 되었다. 일본군과 주민이 동거하는 형태가 되므로 주민들이 일본군의 진지 등의 군사정보를 알게 되었다. 평소에 불신의 대상이었던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군의 기밀을 알게 된 것이다.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은 주민들이 미군의 포로가 될 경우 일본군의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의심한 끝에 끔찍한 학살극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보호해야할 자국민 ‘오키나와 주민’이 미국의 스파이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스파이가 될 소지가 있는 오키나와 주민은 ‘당연히(?)’ 집단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국체호지’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강요한 일본군이, 오키나와인을 집단학살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군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야 할 일본군이 거꾸로 오키나와인에게 총구를 겨눴다. 패잔병이 된 일본군이 동굴에 피난 온 주민들을 동굴 입구로 내몰아 미군의 총받이가 되게 했다. 동굴 속에서 일본군과 주민들은 같은 국민이 아니라 원수이었다. 미군이라는 적을 앞에 두고...

미군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일본군에 의해 죽은 주민의 숫자가 많은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본군에 의한 강제 집단자결,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한 일, 일본군에 식량을 빼앗겨 굶어죽은 일, 일본군이 방공호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내쫓아 죽인 일, 일본군이 퍼뜨린 말라리아에 의해 집단자결한 일 등은 ‘일본군에 의한 군사적 타살’을 대변하며, 이러한 타살에 의해 죽은 사망자가 미군에 의한 사망자 보다 훨씬 많다.


맺는 말


사키마 미술관의 전시품들은 오키나와인 집단자결, 국가 · 군대의 양민학살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장차 한반도에서도 그러한 비극이 되풀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한국전쟁이 재발한다면 ‘제2의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 ‘빨갱이 사냥’ 의식이 잔존해 있지 않은가? 모 우익 인사가 인터넷을 통해 유포하고 있는 진보진영 인사들의 살생부 속에 필자가 끼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 땅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전황에 따라) 그 명단은 ‘제2의 보도연맹 예비명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사키마 미술관의 그림을 보니, 저 그림 속의 인물이 필자 자신의 자화상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림 속의 자화상 앞에 서 있는 필자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내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반전평화 운동을 더 치열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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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43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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