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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교육/평화교육 교안

근대국가 형성 이전의 평화개념

김승국



1. 춘추전국 시대의 ‘和平’



19세기 후반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까지, 동북 아시아는 공통의 평화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동북 아시아 공통의 평화사상은 춘추전국 시대에서 비롯된다. 전쟁으로 날을 지새운 춘추전국 시대의 민중들은, 전쟁이 지긋지긋하여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다. 격양가는 요임금 시절의 태평성세에 민중이 부른 노래로 인류의 오랜 소망이며 무치(無治)의 사회, 즉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열망한 것이다. 이러한 열망을 모아 평화로운 사회 만들기의 대안을 제시한 대표적인 현인들은, 공자·맹자(儒家), 노자·장자(道家), 묵자(墨家)이다. 이들의 대안을 총화한 동북 아시아 공통의 평화 사상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화평(和平)’이다.


‘和平’에서 ‘和’는 벼를 의미하는 ‘禾’와 먹는 입을 의미하는 ‘口’의 합성어로서, ‘밥’이 곧 평화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和’에 ‘平’을 덧붙이면 밥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 ‘밥상 공동체’가 평화의 요체라는 것이다. 한편 ‘禾’는 ‘만나다(會)’ ‘사람의 목소리와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다’ ‘화목하다’는 뜻도 지니므로 ‘소통’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 ‘平’을 부가하면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 상하의 구별 없이(평등하게) 소통이 잘되는 사회가 평화 공동체임을 말해준다.


위의 ‘和平’을 요한 갈퉁의 평화이론으로 재해석하면, 단순하게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소통이 잘되는 밥상 공동체’를 저해하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 억압·착취·虐政·인권탄압·차별·빈곤)이 없는 ‘적극적인 평화(positive peace)’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소극적 평화·적극적 평화의 분화(分化)는 춘추전국 시대에도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직접적 폭력을 양산하는 전쟁체제를 먼저 극복해야 한다는) 소극적 평화론과 (전쟁체제가 빚은 구조적 폭력까지 없애야 한다는) 적극적 평화론이, 춘추전국 시대의 사상체계 안에서 ‘상보적인 분립(分立)’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대 동북 아시아 공통의 평화사상을 큰 틀로 총화해내는 ‘和平’의 범주 안에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는 상보적인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갈수록 유가·도가·묵가 사이에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론의 차이가 드러난다. 특히 당시의 전쟁이 유발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평화로운 사회구성체를 만드는 방법론의 차이가 증폭되었다. 예컨대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평화공동체’는, 유가·법가의 ‘유위(有爲; 부국강병)에 의한 평화공동체’와 방법론상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유가·도가·묵가의 평화론이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차이점은 ‘민중의 안전 보장론[安民論]’의 차이점으로 연결된다.


앞에서 보다시피, 유가의 부국강병론·도가의 무위(無爲) 평화론·묵가의 비공(非攻)론에 따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론의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에서는 ‘중국 중심(中華)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체계’에 의해 동북 아시아의 평화가 근대국가 형성 이전까지 유지되어온 공통점이 있다. 물론 ‘中華의 사대교린 평화체제’를 이룩하려는 국가(중국)·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국가·세력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지만, 사대교린에 입각한 현실주의적인 평화체제는 근대국가 수립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다.



2. 근대국가 수립 이후의 평화개념; 부국 강병론



위와 같은 中華의 ‘사대교린’ 평화체제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양에 침입[西勢東漸]하면서 붕괴되고, 근대국가의 부국 강병론에 입각한 안보 체계가 새롭게 등장한다. 부국 강병론에 입각한 서양식의 안보체계를 맨 먼저 이룬 나라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킨 일본이다. 명치유신의 군사화는 일본군의 해외팽창을 초래했으며, 끝내 한반도의 점령에 이은 중국 대륙 침입을 낳았다. 특히 천황제가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15년 전쟁(1931~45년)’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종군 위안부 문제, 민간인 학살(남경 학살 등), 전쟁의 유제(遺制)는 일본의 패전(1945년) 이후에도 지속되어 동북 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의 저해요소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15년 전쟁’의 유제가 동북 아시아의 냉전체제로 연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도 이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은 점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아직도 동북 아시아에 남아 있는 냉전체제의 뿌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日帝)의 한반도 지배(1910~45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견해를 무시하기 어렵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세계적인 냉전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유제가 아직도 동북 아시아 냉전의 그루터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동북 아시아의 냉전체제는, 1989년의 소비에트 붕괴에 이은 전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해체’와 무관하게 상존하고 있다.


이렇게 끈질긴 동북 아시아의 냉전체제는, 한국(韓)·중국(中)·일본(日) 사이의 국가주의-민족주의 각축으로 이어져 많은 갈등을 낳고 있다. 한(韓)-중(中)-일(日) 3국간의 영토문제<독도(獨島)-다케시마(竹島), 센가쿠(尖閣) 섬, 춘샤오(春曉)유전 개발 문제 등>, 역사논쟁(동북공정 등), 군사대국화 논쟁(일본의 군사대국화 등)은 이러한 갈등이 빚은 문제군(問題群)이다.


따라서 이러한 問題群을 해결하는 동북 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수립하는 게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3. 동북 아시아의 평화공동체 수립을 위한 시민-인민사회의 대응



동북 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한 두 가지 과제가 있다. 첫 번째 과제는, 국가 간의 평화체제 즉 한·중·일 3국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시민사회가 나서서 3국간의 평화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제의 경중과 무관하게 국가 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이 요청된다. 그런데 한·중·일의 시민사회가 ‘국민·인민’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과하면서 다른 색깔을 드러내므로, 시민사회의 평화론만을 고집할 수 없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인민사회 사이의 중용(中庸)’에 무게를 두는 평화론을 전개하는 게 바람직하며, 이를 위한 과도기의 방법으로서 3국의 시민·인민들이 평화의 감수성을 훈련하는 공동의 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3국의 시민·인민들이 상호 소통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에 따라 평화의 감수성을 기르는 평화교육 체계가 중요하다. 중국의 인민은 한국·일본의 시민의 입장에 서서 ‘동북 아시아의 평화공동체 수립에 도움이 되는 감수성 훈련’을 (평화교육의 차원에서) 하고, 한국·일본의 시민은 중국 인민의 입장에서 감수성 훈련에 임하면 좋을 듯하다. ‘역지사지의 감수성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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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52호에 실려 있는 「동북 아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평화 공동체」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