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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전환/칼럼-단상 메모

격양가-善人餓死

격양가-善人餓死

 

한문-인문학 교실 교안 작성을 위한 메모

 

 

김승국

 

 

1. 격양가; 옛날 중국(中國) 요임금(--) 때 늙은 농부(農夫)가 땅을 치면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한 것을 노래한 데서 온 말로 태평(太平)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

 

2. 격양가의 유래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렸던 시대(時代)는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부를 만큼 매우 살기 좋았던 때라고 전한다. 어느 날 요()임금은 자기를 천자(天子)로 받들기를 원하는지, 또한 세상(世上)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평복(平服)을 입고 시찰을 했다. 이때 유행한 민요로 노인이 먹을 것을 입에다 물고서 배를 두드리고, 흙덩이를 치면서,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네.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농사(農事)지어 내 먹는데, 임금의 힘이 어찌 미치리오.라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3. 善人餓死

선인아사(善人餓死)의 대표적인 사례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弟)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 백이숙제라는 선인(善人)의 아사(餓死)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伯夷, 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 “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 叔齊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 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為文王, 東伐紂. 伯夷, 叔齊叩馬而諫曰: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仁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此義人也.” 扶而去之.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 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作歌. 其辭曰: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 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 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顏淵為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우리말 번역>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 군주의 아들이다.무왕이()나라 주()를 치려고 했다.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하기를.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곧바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니 이를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하된 자로써 군주를 시해하려 하니 이를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자 천하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섬겼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이들은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어 불렀다. 가사는 이러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나 뜯어 먹고살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고도 잘못을 모르지(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신농(神農)순임금우왕 때는 홀연히 지나갔지

우린 장차 어디로 돌아가여 좋단 말인가

! 이제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으니

마침내 이들(伯夷叔齊)은 수양산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이로써 보면 백이와 숙제는 과연 세상을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노자는 도덕경79장에서 이같이 말했다. “천도(天道)는 사사롭게 가까이하는 바가 없고, 늘 선한 사람(善人)과 함께한다.”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善人)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했는데도 굶어 죽었다. 또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가운데 오직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으나 안연 역시 늘 가난해 술지게미와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선한 사람(善人)에게 복을 내려준다면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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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주 무왕이 은왕 를 정벌(은왕 의 폭력暴政을 주 무왕의 폭력정벌로 지양함)한데 대한 저항행위로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으며 굶어 죽었다는 것을 以暴易暴(이폭역폭)’으로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백이숙제의 고사(故事)를 말할 때 수양산에 들어가 절개를 지킨 모범으로만 이해하는데, 백이숙제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폭력정치를 일삼은 은왕 를 정벌한 무왕의 역사적인 정당성에 눌려 무왕이 무력(폭력)으로 를 죽인 以暴易暴이 평화적이지 않다는 문제제기에 소홀하다.

 

백이숙제는 폭력(以暴易暴)이 아닌 방법으로 를 내쫓아야했는데 그렇지 못한 무왕에 대한 저항정신을 지닌 채 수양산에 들어가 餓死했다. 이러한 평화지향적인 행동 때문에 그들이 善人으로 칭송받을만하며 善人餓死하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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